현재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구조적인 인종차별, 공권력의 무분별한 폭력, 이를 두둔하는 시스템, 그리고 이를 지지하는 인종차별주의자에 대해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의 사람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다음 항목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왜 중요한지 편향된 언론 트위터 읽어보기 후원하기 공부하기 이야기하기 왜 중요한지 한국 안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상관없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국가의 경계가 약해져가고 있고, 전 세계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연결되어 있는 시기입니다. COVID-19를 거치면서 한국이 다른 많은 나라를 도와주기도 했고, 홍콩의 민주화 시위를 보면서 80년대를 떠올리며 안타까워하고 있죠.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 특히 그게 인권에 관련된 일이라면 서로 돕고 지지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데 다른 나라의 많은 도움이 있었듯이요. 한번 이기적인 관점에서 본다고 쳐도, 인종 차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여행이나 비즈니스 등 한국을 벗어날 때 받을 차별을 상상해보세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가 아닙니다. 미국만큼 인종과 민족이 섞여 있진 않지만, 우리 눈에 띄지 않는 인종차별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인종차별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종차별에 무지하다는 것은, 우리는 이 나라에서 그래도 상관없이 잘 살아갈 수 있다는 특권을 가진 것이고,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한국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제가 이 글에서 지면을 더 크게 할애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렵고, 그저 "은재가 해외에 사니 인종 차별이 없어져서 안전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식으로라도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편향된 언론 언론사들은 제각기 편집 방향과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내의 메이저 언론사들은 대부분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고, 기득권의 권리를 보장하고자, 노조, 파업, 시위(가령 촛불집회) 등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사를 써오고 있습니다. 박근혜 탄핵을 위한 촛불집회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현실을 왜곡하는 악질적인 기사들이 많았죠.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미국이든 한국이든 언론은 자기들 입맛에 맞게 일부는 축소하고 일부는 확대해서 보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실인가? 답은 없습니다. 언론의 장난질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개인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자료를 찾아보고 사람들이 올리는 내용들을 종합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덧입혀 판단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언론사도, 절대적으로 틀린 언론사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봤을 때 지나치게 편향되었다 생각되는 기사의 하나만 같이 읽어볼까요. 제목: "매장 털리는 것 CCTV로 보고 발만 굴러.. 40년 일군 가게 하루아침에 잿더미" 기사에 데이비드 김 씨에 대한 내용은 딱 저 부분뿐이어서 저만큼만 발췌했습니다. 기사를 다 읽고 나니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안타까운 한 교민이 흑인 시위자의 약탈에 의해 사업이 무너졌네요. 그런데 정말일까요? 여러 차례 검색을 해서 미국 쪽 뉴스 사이트에서 데이비드 김 씨를 다룬 기사 몇몇을 찾았습니다만, 가해자가 누구였는지 언급한 기사까지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흑인이 가해자인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할 수 없겠네요. 그러나 일단 이 한글 기사에서는 얼핏 다음 두 내용이 팩트 같이 들리는데요. 흑인 시위자가 공격했다. 백인 여성이 복구를 도왔다. 기자가 정말 두 팩트를 확인하고 기사를 썼을까요? 정말 그랬다면, 명시적으로 "흑인의 공격에 가게가 불탔다"라고 적었을 겁니다. 하지만 확증은 없었나 봅니다. 묘하게 그 표현은 쓸듯 쓸듯 쓰지 않았네요. 기사를 보다 보면 사실과 관련이 없는데 관련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군더더기를 붙이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덜하지만 성범죄 피해자인 여성에 책임 소지를 전가하고 싶은 기자가 이런 식의 제목을 쓰는 것 다들 많이 보셨죠. 술집 근처에서 밤늦게 짧은 치마를 입은 여대생이 성폭행당해 누가 봐도 의도가 보이지 않나요. 그냥 여성이 혹은 한 사람이 성폭행당했다고 하면 될 텐데, 굳이 피해자가 당할 법한 행동을 했다는 식의 뉘앙스를 교묘하게 심어줍니다. 다시 아까 기사로 돌아가서 기자는 흑인의 공격이라는 증거가 없는 것 같지만, 흑인의 공격처럼 보이게끔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위 밑밥만 잔뜩 깔려있거든요. 주민의 71%가 아프리카계라고 일단 인구 비율을 깔아놨고, 흑인 손님들과 친근하게 지냈기에 더 안타까웠다는 표현이 들어갔고 ('흑인이 뒤통수를 쳤다'는 뉘앙스), 복구를 한 명이 도왔는지 열명이 도왔는지는 말하지 않은 채, 백인 여성 한 명만 언급을 했고, 김 씨를 도울 수 있어 "영광"이었다는 표현을 써서 결과적으로 흑인과의 대비되는 인상을 줬습니다. 사실은 뭔지 상관도 없이, 그저 짜 놓은 프레임을 전달하기 위해 이런저런 재료를 가져다가 이야기를 만든 그런 기사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찾았던 다른 기사에서는 좀 더 사실에 집중하고, 김 씨를 후원하는 방법도 소개를 하는 등, 이 기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참고로 데이비드 김 씨를 후원하기 위한 페이지가 이 글을 쓰는 시각 기준으로 3일 전에 개설되었고 지금까지 목표 금액의 절반 정도인 약 8천5백만 원이 모금되었습니다. 마음이 가신다면 아주 적은 금액이라도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당 후원 페이지에 가시면 데이비드 김 씨가 미국까지 건너가게 된 여정을 포함해 더 많은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트위터 읽어보기 한국과 달리 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트위터를 폭넓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번 시위 중에도 실시간으로 많은 정보와 사진, 영상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몇몇 중요한 트윗들을 열거해보겠습니다. 보기 힘들고 거북하시더라도 끝까지 참고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조지 플로이드 씨 사망 이후로 폭발한 시위에, 많은 사람들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긴 역사 동안 억압받았지만, 그래도 사회 법규를 지키려 노력해왔는데, 경찰은 조지 플로이드 씨의 목을 무릎으로 눌렀습니다. 그 와중에 그는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고, 그저 숨을 쉴 수 없다고만 말하다가 결국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렇게 법규를 지키라 말해서 지켰지만 결국 안전을 지켜야 할 경찰 손에 아이러니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걸 지켜본 흑인들의 마음이 온전할 수 있을까요. 시위가 시작되고 어떤 사람들은 상점들을 파괴했고, 약탈했습니다. 하지만 그 행동들을 가지고 이 전체의 시위를 물타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시위대는 더 나은 시위를 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오고 있습니다. ↓ 한 백인이 보도 블록을 망치로 깨서 그 조각으로 사람들을 공격하려는데, 시위하던 사람들이 이 사람을 제압하고 경찰에 인계합니다. ↓ 한 백인이 스케이트 보드로 상점 유리를 깨고 약탈하려 하지만, 주변 흑인들이 달려와 제지합니다. 흑인이 약탈을 한건 가요. 백인이 약탈을 한건 가요. 그냥 일부의 사람들이 약탈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연합합니다. 그리고 사건의 본질인, 폭력적인 법 위에 있는 경찰들에게 대항합니다. ↓ 메가폰을 든 사람이 평화로운 시위를 하기로 약속해달라 말하고, 사람들은 동의의 박수를 칩니다. ↓ 한 사람이 시위대에게 마스크를 나눠줍니다. ↓ 시위가 끝나고 길거리를 청소합니다. ↓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한 명의 경찰을 시위대가 둘러싸서 보호합니다. ↓ 이 시위에 반대하는 일부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시위대를 공격하려 나서기도 합니다. 이 남성은 실제 사냥용 활을 들고 시위대를 겨냥하다가 제지당합니다. ↓ 평화롭게 거리도 지켜가며 손을 든 채 가만히 서서 시위를 합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경찰이 최루탄을 던지며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 미국에서 경찰은 네임 태그, 바디 캠, 뱃지 넘버를 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떼거나 가린 경찰들이 너무나 많이 목격됩니다. ↓ 피를 포함한 잔인한 장면이 담겨있습니다. 심신이 미약하시면 보지 않으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 현 미국의 상황을 너무나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앞 차의 백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입니다. 바로 뒤에 있는 차에는 흑인 두 명이 타있는데 이유 없이 경찰들이 그들을 막아서고 타이어를 터뜨려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끌어내립니다. ↓ 급기야 군인들이 동원됩니다. 시위하는 국민을 대상으로 군인이 동원되는, 1980년대의 한국이 연상됩니다. ↓ 경찰이 평화롭게 시위하는 시민을 상대로 저지르는 무자비한 폭력을 모은 스레드입니다. 후원하기 전 세계에서 미국과 필리핀 딱 두 국가에만 있는 제도가 있는데요. 일단 경찰에 연행되어가면 죄의 유무에 상관없이 재판이 열릴 때까지 계속 구치소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려면 보석금을 내야 합니다. 결국 돈이 없는 사람은 죄의 유무에 상관없이, 일단 경찰에 끌려가면 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날 때까지 구치소 생활을 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제도인데요. 위의 트윗들을 통해 보다시피 미국 경찰들이 정말 닥치는 대로 길거리에 있는 시위하는 사람들에게 최루탄을 던지고 곤봉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죄목 없이 잡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시국에, 가장 시급하게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빼낼 보석금을 후원하는 일입니다. 그 보석금을 내야 하는 제도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을 구치소에 방치할 수는 없으니, 긴급하게 그들은 빼내고, 이 시스템은 좋은 정치인을 뽑음으로써 개선해 가야겠죠. 그래서 저와 제 아내 민지는 같이 고민해보았고 저희가 할 수 있는 적은 금액이나마 후원했습니다. 여러분도 단돈 천 원이라도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아래 목록의 단체들에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직접 사이트에 들어가서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후원금을 사용하는 곳인지 확인해보시는 걸 추천해드리나, 저한테 메시지 주시면 제가 사이트를 고르는 부분에서부터 실제로 송금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도와드리겠습니다. Black Visions Collective Reclaim the Block NAACP Legal Defense Fund Black Lives Matter National Bail Out Fund George Floyd Memorial Fund Showing Up for Racial Justice Campaign Zero The Loveland Foundation The Marshall Project Color of Change Bail Out Fund Google Doc 공부하기 저희 부부가 금액은 정말 적지만 그 돈을 보냈다고, 그리고 이런 글을 올린다고 "내 몫은 다 했으니 이제 맘 편히 지내야지"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을 내서 인종차별에 대해 공부하고, 내 의식을 바꾸려 노력하고, 차별받던 그들의 비즈니스를 이용하는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읽고 공부할 한국어로 된 좋은 자료가 어떤 게 있는지 몰라서 적지 못하는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혹시 추천해주신다면 여기에 덧붙이겠습니다. https://docs.google.com/document/d/1zh6reFJWkZRGBL5iIezTfA2tkKBB3X9JcMh2QYT8tWk/edit 위 문서에 다양하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액션이 적혀있습니다. 이야기하기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말을 하다가 실수를 할 수도 있고, 틀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야기 나누며 서로서로 발전해나가야 합니다. 저도 지난 한 주간 많은 글을 읽고 사람들과 대화하며 고민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궁금한 점, 이해가 안 가는 점, 혹은 저와 반대되는 의견을 갖고 계시더라도 주저하지 말고 저에게 메시지 주시고 같이 대화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이게 널리 퍼져서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왜 떠났는지, 그리고 왜 Algolia 였는지
하루에 수없이 많은 일이 벌어진다. 아침에 출근하러 집을 나서 길을 걷다가 불규칙한 보도블록에 발을 삐끗할 뻔하다 무사히 균형을 잡아내고, 내 눈으로 날아드는 꽃가루를 피해 걸으며, 휴대폰으로 넷플릭스를 보는데 강한 아침 햇살에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아 휴대폰을 들고 있는 각도를 이리저리 바꿔보지만 영 시원찮다. 아마 이렇게 적자면 한도 끝도 없이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잠자리에 들며 '오늘 뭐했지?' 생각해보면 '출근해서 일하다 퇴근하고 저녁 먹고 집안일 조금 하다 하루가 갔구나'라는 요약본을 만나게 된다. 추상화는 자연스럽다. 추상화를 거치지 않으면 처리할 데이터가 너무 많아 뇌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추상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추상화의 레벨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오늘 일 했다'라고 추상화해버릴 수도 있지만 '오늘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잘 모르는 다른 팀 누구누구를 만나 같이 먹었는데 이러이러한 대화 내용이 재밌었고, 그 후에 일을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었는데 동료 누구가 친절하게도 도움을 줘서 잘 해냈고 나도 다음에 그를 도와주기로 결심했다'와 같이 비교적 상세하게 추상화할 수도 있다. 이는 내 선택에 달린 것이다. 전자에 비해 후자는 에너지 소모가 크다. 하지만 똑같은 경험을 했더라도 후자는 남는 게 많다. 깨닫는 점도 많고 일상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에너지를 그만큼 사용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풍성함에 의해 도리어 에너지가 충전되기도 한다. 바쁜 업무 가운데 빠져들며 아무 에너지 없이 일상을 두리뭉실하게 추상화해버리며 지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적은 글이다.
싱가포르와 프랑스 두 나라밖에 겪어보지 않았지만, 나라가 바뀐다고 내 생활양식이 크게 바뀌진 않는 것 같다. 디테일은 바뀌더라도 큰 틀은 유지된다. 하지만 해외 이사 같은 큰 일을 겪는 과정에서는 생활양식 일부를 놓친 채 지내게 된다. 그리고 그 일이 마무리되어 감에 따라 놓쳤던 것들을 하나하나 되찾으면, 그제야 일상으로 복귀하는 걸 느낀다. 파리에 도착해 집을 구하고 보니 주방에 가스레인지도 없고 장도 하나 없고 낡은 싱크대 하나가 전부였다. 다들 장을 들고 다니는 건지, 보러 다니는 집마다 부엌이 다 그런 편이었다. 입주 후 주방 업체를 몇 군데 다니며 견적을 받고, 업체를 선정하고, 스케치를 하고, 업체에서 제작을 해서, 집에 가져와 설치를 하기까지 두 달 정도 걸렸다. 그동안 요리를 해 먹을 수 없었다. 모든 끼니를 사 먹어야 했다. 동네 가까운 식당을 내 집 드나들듯 갔고, 배달 음식을 물리도록 먹었다. 싸구려 핫플레이트를 하나 사서 그걸로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지만, 성능이 나빠서 물 한번 끓이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 시기를 견뎌내고 주방이 생겼다. 그러고 나니 소소하게나마 밥을 지어먹을 수 있게 되었다. 임시로 사는 느낌에서 벗어나 조금 더 집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군들 안 그러겠냐만, 우리는 커피를 좋아한다. 맛있게 커피를 만들어 먹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핸드밀에 신선한 원두를 적정량 넣고, 차분히 핸들을 돌려 원두를 갈아낸 후, 핸드 드립, 커피 머신, 프렌치 프레스, 모카포트 중 그 상황에 어울리는 방식을 골라 커피를 만들어 낸다. 느리게 음료를 만들어 느리게 즐기는 이 행위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게다가 집에 있는 원두를 꾸준히 소비하고 밖에 나가 갓 볶은 좋은 원두를 사 와야 하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도 필요하다. 그런 게 그간 없었다. 2월에 프랑스에 도착하면서 우리는 급한 대로 인스턴트커피를 사서 뜨거운 물에 타 먹기 시작했다. 잠깐일 줄 알았던 그 커피는 한동안 우리 곁을 떠나지 못했다. 진짜 커피를 마시고 싶지만 여력이 없어 인스턴트커피를 계속 마실 수밖에 없었다. 한 병, 두 병, 세 병, 계속 사서 다 마시고 또 사는 일이 반복됐다. 언제까지 마시게 될지 가늠도 안 갔다. 그러다 얼마 전 여유가 생긴 아내가 괜찮은 원두를 파는 곳을 물색해보더니 원두를 사 왔다. 그리고 기념으로 커피 머신을 깨끗이 청소했다. 청소해야 할 많고 많은 곳들을 어느 정도 끝내고 이제는 커피 머신을 청소할 여유는 생긴 것이다. 영원히 먹게 될 것만 같던 인스턴트커피는 장 깊숙이 밀어 넣었다. 피곤할 땐 인스턴트로 먹을 테지만, 그래도 사온 원두로 만들어 먹는 커피가 우리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조금씩 잊고 지냈던 우리의 생활양식을 다시 되찾고 있다. 회사에 출근하는 일도 익숙해지고, 점점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 같다.
얼마 전에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본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엑셀 자료를 열심히 정리해서 상사에게 제출했다. 그런데 상사는 "위험하게" 수식을 썼다며 화를 냈다. 그리고 그는 엑셀 시트를 프린터로 인쇄하더니 계산기로 하나하나 두드리며 맞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차라리 그 노력을 수식이 맞게 짜였는지 확인하는데 썼으면 좋았을 텐데. 컴퓨터가 생긴 이후로 우리는 불필요한 반복은 최대한 컴퓨터에 맡기려 노력해왔다. 개발자가 갖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자신의 업무 중 반복되는 부분이 있다면,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어서 자동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회사에는 크고 작게 자동화된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내부에서 사용하는 도구를 만드는 팀이 별도로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몇 가지를 소개하겠다. 1. "팀원 여러분, 나 내일 휴가예요"라고 슬랙(Slack, 업무용 메신저)에 입력하면, 자동으로 "휴가 신청했나요? -> [링크]"라는 메시지가 뜨면서 휴가 신청 사이트의 링크가 나타난다. 이는 슬랙의 Custom Responses 기능을 이용한 것이다. 2. 내가 일하는 팀에는 고객 문의를 응대하는 당직이 있다. 자동화된 툴이 당직 스케줄을 짜서 주초에 한 주간의 스케줄을 슬랙으로 공유해주며, 매일매일 그 날의 당번이 누구인지 알려준다. 그리고 그 날 하루 동안 처리해야 하는 문의 티켓을 당직인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해준다. 3. #misc-today 라는 슬랙 채널에는 매일 아침 그 날의 요약을 보여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된다. 오늘 생일인 사람 오늘 면접 보러 오는 사람 오늘 입사 첫날인 사람 오늘 입사 N 주년인 사람 오늘 있을 큰 행사 그리고 이 내용은 회사 공동 구역에 놓인 모니터에도 사진과 함께 크게 표시된다. 커피를 마시다 모니터를 바라보면 누구에게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넬지 알 수 있다. 4. 신규 입사자가 회사에 정착하기까지 약 3개월간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을 줄 온보딩 버디(Onboarding buddy)가 bot에 의해 매칭 된다. bot 이 먼저 랜덤 한 누군가에게 "xx의 온보딩 버디가 되시겠습니까?"라고 묻고, 그 사람이 수락하면, 해당 입사자의 입사 첫 날 아침에 자동으로 누가 누구의 버디인지 다시 한번 전사적으로 공지된다. 5. 새롭게 등록된 채용 공고가 슬랙에 자동으로 공유된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링크를 누르면 현재 오픈된 모든 공고를 볼 수 있다. 6. 지난 하루 동안 생성된 새로운 채널 목록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채널이 따로 있다. 이를 통해 다른 부서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주의해야 할 점은 몇 가지 있다. 시간을 들여 자동화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수동으로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너무 완벽한 자동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적정선에서 타협을 보며 반자동화를 하는 게 더 현명할 때도 있다. 정형화된 패턴을 충분히 파악하기 전에 섣불리 자동화를 하면, 나중에 유지 보수하기 더 힘들어진다. 회사나 부서에 따라 자동화를 하기 위해 들이는 시간을 업무로써 인정해 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일상의 업무 중에 반복되는, 자동화할 만한 업무가 있을까? 실제로 자동화까지 이어지진 않더라도, 내가 해오고 있는 반복적인 업무가 뭔지 고민해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이사"는 참 골치 아픈 일이다. (전세의 경우) 지금 사는 집주인에게 나가겠다 통보하고, 이사 갈 집을 구하고, 지금 집에도 들어올 세입자가 구해지고, 내가 들어갈 집도 내가 이사하려는 날 나가고,... 이 모든 이사들이 연쇄작용을 해서 누군가 내는 전세금을 다른 누군가 되돌려 받는 연결 고리가 유지된 채 무사히 진행된다. 해외 이사는 다른 의미로 어렵다. 나는 이미 2년 전쯤 한국에서 싱가포르로 해외 이사를 겪었기 때문에, 이번 싱가포르에서 파리로의 이사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다. 대략적인 절차가 동일하니 낯선 부분은 없었다. 우선 이사 업체를 선정해야 했다. 괜찮아 보이는 한 업체를 찾았다. 그 업체가 집으로 와서 대략적인 예상 견적을 냈다. 730 큐빅 피트(21 큐빅 미터) 정도의 부피를 차지할 것 같고, 금액은 9,198 SGD를 예상했다. 그래서 저 수치를 가지고 다른 업체들에 메일을 보냈다. 그냥 견적을 문의하면, 집에 와서 보겠다고 할 테니 내가 알고 있는 그 부피만 알려주면서 그에 대한 가격을 받았다. 금액은 대동소이했다. 처음 견적 받은 업체가 그중에 제일 비싸긴 했지만 그 업체로 정했다. 작은 업체의 경우 짐을 싸서 발송하면, 목적지에서 그걸 받아서 배달해주는 건 이 업체가 아닌 이 업체가 계약을 맺은 다른 업체인 경우가 많다. 그러면 문제가 생겼을 때, 보내다 생긴 건지, 받다가 생긴 건지, 둘 간의 책임 회피가 있을 수 있다고 들었다. 정말 그럴진 모르겠지만 일단 가격 차이가 크지 않아서 안전하게(?) 글로벌 업체로 선택했다. 이제 짐을 분류해야 했다. 배로 보낼 짐과 우리가 직접 들고 갈 짐을 나눠야 했다. 싱가포르에서 파리까지 우리 이삿짐이 담긴 배가 3주 조금 넘게 걸려 온다고 했다. 우리는 임시 숙소를 한 달 예약해놨으니 거기서 한 달간 사용할 것들을 챙겨가야 했다. 겨울이라 옷은 몇 벌 안 챙겼는데도 부피가 컸다. 게다가 유럽의 난방 시설은 집마다 다르지만 잘못 걸리면 너무 춥다는 걸 알기에 전기장판도 이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좀 과했나 싶지만, 돌이켜보니 집 구하러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숙소에 돌아와 전기장판 위에서 몸일 녹이는 것 만한 힐링이 없었던 것 같다. 파리로 이사 가기 전에 잠깐 한국에 다녀왔었는데 그때 장모님이 담가 주신 김치가 있었다. 이건 배로 보내면 너무 쉬기 때문에 아이스박스에 담아 위탁 수하물로 비행기에 실었다. 그리고 원래 냉장고에 있던 오래된 김치는 버릴 수는 없으니 꽁꽁 얼리고 잘 싸서 배에 부쳤다. 이건 묵은지가 될 테고 요리 용으로 사용하면 된다. 다만 발효되면서 터진다거나 하면 다른 짐을 다 망칠 수 있으니 아주 잘 싸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들고 갈 짐을 아이스박스, 위탁 수하물, 기내 수하물로 분류해서 정리했다. 최대한 적게 가져간다고 했지만, 결국 전체 짐은 100kg이나 나갔다. 파리에 도착하고 우리는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 내용은 다른 글에서 다뤘으니 생략하도록 한다. 다만 이사 업체에서 배송 주소를 알려달라고 자꾸 연락이 오는데 아직 집을 못 구해서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느라 진땀을 뺐다. 언제 알려줄 거냐는 그 연락이 너무 큰 압박이었다. 그리고 도착해서 한동안은 선불 유심을 사용해야 했다. 그 당시에는 실제로 거주하는 집 주소, 현지 은행 계좌, 현지 신용카드 등이 없었기 때문에, 후불 유심을 구입하기가 어려웠다. 한 가지 눈 뜨고 코 베인 것 같은 부분이 있다. 맨 처음 이사 업체에서 예상 견적을 내고 돌아간 이후, 우리는 꽤 많은 짐들을 버렸다. 부피가 큰 것 중에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과감하게 버렸다. 일부는 팔기도 했고 지인에게 주기도 했다. 한 푼이라도 이사 비용을 줄이고 싶었고, 파리에서 구할 집이 싱가포르에서 살던 집보다 작을 거란 가정하에 짐의 부피를 줄이고 싶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사 업체는 이사 전날, 그리고 이사 당일날 나에게 이사 비용을 입금하라는 메일을 보내왔다. 나는 의아해서, "실제 짐을 다 싣고 그 부피에 따라 최종 금액이 결정되는 것 아니냐"라고 되물었고 그들은 맞다고 했다. 이사가 다 끝나고 그다음 날 최종 금액이 어떻게 되는지 물었고 그들은 예상치 그대로 나왔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확인해 볼 방법이 없어서 그대로 낼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크게 견적 잡고 그대로 쭉 밀고 나가도 내가 어찌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짐이 파리에 도착하고 나서, 인부들이 짐을 푸는 과정에서 가구 일부가 파손됐다. 그 이사 업체에 보험을 미리 들어놨기에 사진을 보내 수리 비용을 청구했다. 그리고 그들은 꽤 빠른 시일 안에 우리에게 입금해줬다. 그런데 그 절차가 너무 간단하고, 내가 요구한 금액에 대해 자세히 따지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입금을 해줘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큰 금액을 요구할 걸... 왠지 초반 견적을 약간 뻥튀기해서 받은 다음에, 파손이 생기면 그 버퍼를 이용해서 보상하는 게 아니었을까. 억울하지만, 너무 바쁘고 피곤하면 일부 추가 지출에 대해서는 포기하게 되는 것 같다. 힘드니까 돈 좀 더 내고 말자하는 생각. 물론 다 합치면 크지만, 알고 있더라도 대응할 여력이 없던 건 사실이다. 파리에서 파리로, 혹은 파리에서 인접한 다른 곳으로 육로를 통해 이사하는 일은 비교적 쉬울 것 같다. 미리 집 구해놓고 일정 잡아서 진행하면 되니까. 목적지가 없는 상태에서 짐이 오고 있다는 부담감이 너무 컸다. 한동안은 하고 싶지 않다.
2011년도 한 회사에 신입 공채로 입사했다. 신입 교육이 끝난 후 팀 배치가 있었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신입이 이 팀으로 왔다. 그리고 세 달의 수습 기간이 있었다. 처음엔 마냥 즐거웠지만, 입사 셋째 달이 되면서 살짝 긴장감이 생겼다. 웬만해서는 수습을 탈락하지 않는다 했지만, 그래도 1% 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마냥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셋째 달 중순쯤 되었을까. 일을 하다 보니 팀 자리에 우리 신입 세 명만 자리에 앉아있었고 다른 분들은 어딘가로 다 가고 안 계시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셋 명이서 모인 메신저 방에서 대화를 나눴다. 다들 어디 가셨지? 우리의 탈락 여부를 결정하는 회의를 하시는 건 아닐까? 그분들이 자리로 돌아오기까지 계속 긴장하며 기다렸다. 우리 셋이 홀로 남겨진 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에 우리에겐 은근한 긴장과 스트레스였다. 그 회의가 탈락 여부를 결정하는 회의인진 확인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셋은 전부 수습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2019년 현재, Why am I alone? 이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자리에 나 빼고 아무도 없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2011년도의 그런 긴장감까진 아니어도, 다들 어디 갔길래 나만 혼자 앉아있나 이상했다. 심지어 동료들이 다른 회의가 있나 일정을 살펴보기도 했다. 이런 일이 두 번 세 번 반복됐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유독 팀 회의가 끝나고 난 후에 이런 일이 잦은 것 같았다. 확인해보자. 팀 회의가 끝나고, 회의실에서 아주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다른 사람들 뒤로 뒤쳐져서 다들 어디 가나 따라가 봤다. 보니까 자연스레 다들 커피머신 쪽으로 갔다. 탕비실이라 부르긴 좀 그렇고, 사내 카페라고 부르기도 좀 그런, 홀 구석에 커피머신을 비롯해 간식이 놓여 있는 공간이 있다. 다들 그곳으로 갔다. 누구는 커피를 마시고, 누구는 차를 마시고, 누구는 과자를 먹고, 누구는 딱히 먹거나 마시는 거 없이 그냥 그곳에 서성이며 서 있었다. 나도 자연스레 껴서 커피 한잔을 뽑았다. 그들은 방금 한 회의에 대한 가벼운 얘기를 나누는 듯하더니 개인적인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나만 빼고 어떻게 다들 알고 있나 싶던 서로의 휴가 계획 같은 그런 이야기가 오갔다. 이게 이들의 커피 타임이었다. 굳이 커피 마시자며 다 같이 움직이는 게 아니고 낄 사람 자연스레 끼고 아니면 자기 자리 가는 그런 것이었다. 한국에서 내가 일했던 팀들에서는 주로 "커피 마셔요"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꼭 있었고, 우리는 그 소리에 이끌려 커피를 마시러 가서 담소를 나누곤 했다. 나는 누군가 커피 마시자고 말하면 그때 다 같이 가는 것에 익숙했고, 이들은 누구도 그런 얘기를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듯했다. 한국의 모든 팀이 그렇진 않겠고, 파리의 모든 팀이 이렇진 않겠지만, 이 사소한 차이를 몰랐다면 영원히 혼자 커피타임을 할 뻔했다며 혼자 마음속으로 호들갑을 떨어 보았다. 그리고 사소하면 잘 잊히는 법이니까, 이렇게 굳이 글로도 적어 보았다.
게임에는 보통 레벨 시스템이 있다. 레벨 1에서 시작해서, 경험치가 쌓일 때마다 레벨이 오른다. 레벨에 따라 할 수 있는 것과 갈 수 있는 곳이 달라진다. 레벨이 오를수록 미션은 어려워지지만 그만큼 클리어했을 때 쌓이는 경험치도 크다. 게임의 이런 구조는 실제 우리의 삶을 요약한 것 마냥 비슷하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게임이 훨씬 이상적이다. 현실에서는 큰 노력을 기울이고 어려운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더라도, 그에 합당한 인정이나 보상을 받지 못하고 넘어가는 일이 많다. 불투명한 혹은 불공평한 인사 정책에 의해 기대했던 인정과 보상을 못 받기도 한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늘 정확하게 내가 한 만큼 보상받는다. 만약 직장 생활도 그렇다면 어떨까? 레벨업을 언제 할 수 있는지 가늠조차 가지 않아 무력하게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고 얼마큼 더 가면 어떤 레벨에 도달할지 명확히 알 수 있다면 어떨까? 이를 위해 정규화된 기준이 주어진다면 어떨까?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매주 전 직원이 다 같이 모이는 미팅이 있는데, 최근에 이 미팅에서 레벨에 대한 기준(Level Framework)이 발표되었다. 회사 초기부터 이런 기준이 있긴 했지만, 큰 폭으로 증가한 직원수와 회사 규모에 맞게 최근 약 6개월에 걸쳐 개편한 내용이었다. 참 이 회사 답다고 느꼈던 지점은, 정해진 기준을 공지하듯 발표한 게 아니라, 이렇게 초안을 잡아봤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듣고 좀 더 현실적으로 다듬어가기 위한 발표였다는 점이다. 이 Level Framework 은 각 레벨의 직원에게 어떠한 것이 기대되는지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기대치는 여러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예를 들면 개발, 업무 관리, 팀워크, 커뮤니케이션 등이 있다. 각 카테고리별로 자세히 항목들이 담겨 있다. 이 내용들은 단순히 '이거 해내면 다음 레벨로 올려줄게'라는 회사의 일방적인 요구가 아니다. 잘 달성해내면 실제로 나의 능력과 가치가 여러 방면에서 높아질 그런 내용이었고, 그게 결국엔 회사에 좋게 작용할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회사는 정말 직원들이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도록 격려하고 있으며, 객관적 지표를 통해 그걸 이뤄내면 합당한 레벨로 올려주고 그에 맞는 보상(연봉)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매니저와 2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약 15분의 짧은 면담을 갖고 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일하는데 어려움은 없는지, 동료들과 잘 어울리고 있는지, 프랑스 생활에 적응은 잘 되어가고 있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면담에는 Level Framework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다음 레벨로 가고 싶은 열망이 큰 걸 매니저가 알고 있다. 그는 내년 1월에 있을 평가를 목표로 해서 내가 갖춰야 할 부분들을 갖출 수 있도록 남은 7개월 정도를 잘 보내보자고 나한테 얘기했다. 조만간 각 항목들에 대해 내가 얼마큼 기대치를 충족하고 있는지, 어떻게 더 개선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액션 플랜을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면담을 통해 진행 상황을 점검해보며 결국에는 내년 1월까지 레벨업을 위한 경험치를 다 쌓도록 해볼 것이다. 그때까지 다 될진 모르겠지만, 회사가 독려하고 있고, 매니저가 독려하고 있으니, 힘을 내서 적극적으로 임해볼 생각이다. 남은 올 한 해 동안 단순히 많은 업무를 버텨내며 보내진 않을 것 같다. 내가 지금 갖추지 못한 여러 부분들을 채워가려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내년 1월에 레벨업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지 못하더라도 그만큼 많이 배우고 성장해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나는 의심이 많은 편이다. 원래 성격이 그런데다, 직업병까지 더해진 것 같다. 그래서 직접 실험을 하고 결과를 보기 전에는 '그런 의견들이 있구나' 정도로 한편에 쌓아 놓지, 쉽사리 믿지는 않는다. 프랑스로 이사하면서, 프랑스인들의 콧대가 높으니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들은 영어를 다 알아들으면서도 자존심이 세서 불어로 답변하는 사람들이라고 들었다. 내가 모든 프랑스인을 만나서 확인해 볼 수 없기 때문에 프랑스인은 콧대가 높다든지 프랑스인은 콧대가 높지 않다는 결론에는 절대 다다를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내가 만난 프랑스인들은 대체로 이렇더라" 정도로는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집을 구하려고 한창 부동산에 전화를 돌리던 때였다. 한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인터넷에 당신들이 올린 매물을 보았는데, 보러 갈 수 있냐"라고 영어로 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극도의 긴장감이 전해졌다. 그 사람은 다급하게 이렇게 말했다. I am sorry. I don't speak English. Let me find my colleague who speaks English. 방금 저렇게 유창하게 말해놓고 영어를 못한다고? 그는 심지어 관계대명사 who를 써서 my colleague를 수식하는 문장을 썼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작성한 문장이 아니라, 다급해하며 입 밖으로 순식간에 내뱉은 문장이었다. 영어를 못한다는 사람이 내뱉은 문장이 저렇다니 놀랐다. 그런데 영어를 못한다는 그 말에서 정말 자신 없어하는 게 느껴지긴 했다. 그 사람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점이 더 놀라웠다. 내 영어라고 별반 다르지 않은데... 부동산들을 만나 집을 보러 다니면서 부동산 직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I am sorry. My English is terrible."이었다. 사실 대부분 영어가 들을 만했다. 몇몇 어려운 어휘에 있어 서로 고심하며 번역기를 두드리긴 했지만, 전반적인 소통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늘 영어를 못해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했다. 오히려 불어를 못해 내가 미안한 건데.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내가 만난 프랑스인들의 영어 실력이 전반적으로 좋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프랑스인 동료가 의아해하며 "프랑스인은 영어 못하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며 수줍어했다. 지하철을 타다 보면, 광고판에 Wall Street English 어학원 광고가 자주 보였다. 그런 점에서는 파리나 서울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한국인이 한국인스럽게 영어를 하듯, 프랑스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입사 초반에 회의를 하는데 동료가 "큐스토머 슈포트"를 해야 한다고 해서 무슨 뜻일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게 "customer support" 였다는 걸 깨닫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었다. "identify"를 "아이덴티파이"가 아닌 "이덴티파이"로 발음하기도 하며, "more"를 "모어"가 아닌 "모ㅎㅋㅓ"로 발음한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갈수록 이런 차이점을 깨달으니 소통이 조금씩 편해지는 것 같다. 많은 여행객들이 느끼고 전파한 이야기처럼, 콧대 높게 불어로만 답하는 프랑스인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어 리스닝에 비해 스피킹엔 자신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불어로 답변을 해야 했던 프랑스인도 분명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중엔 "영어를 못해서 미안해"라는 말을 불어로, 혹은 불어처럼 들리는 영어로 말한 이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이들은 이러하다"라고 단편적으로 결론 내리는 건 싫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이 있는지 발견해가는 게 즐겁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는 전 직원이 다 같이 모이는 주간 미팅이 있다.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듣는 그런 시간은 아니다. 형식적으로 의무감에 하는 영양가 없는 시간도 아니다. 매번 꽤 흥미롭고 유익하다. 회사 오피스가 세계 여러 곳에 있다. 이 미팅을 위해 각 오피스 직원들은 각 오피스 별로 있는 큰 공간에 모인다. 그리고 파리, 런던, 뉴욕, 애틀랜타, 샌프란시스코 등 모든 오피스가 화상 통화로 연결된다. 매주 화요일마다 최대 한 시간 정도 진행된다. 어떨 땐 30분 만에 끝난다. 강제는 아니지만 의미 있는 내용들로 간결하게 진행되기에 대부분 자발적으로 참석한다. CEO 가 몇 가지 코너를 빠르게 진행한다. 첫 번째는 신규 입사자 소개이다. 요즘 같은 경우엔 2주에 한 번씩 5-6명 정도가 입사하고 있다. 신규 입사자들이 간략하게 인사 및 자기소개를 한다. 자기소개에는 자신에 관련된 재밌는 사실(Fun Fact) 한 가지를 말하는 게 일종의 룰이다. 그다음은 특정 부서에서 전사에 공유하고 싶은 내용을 발표한다. 보통 두 팀 정도가 한다. 각 팀 당 5~6 슬라이드 정도에 10-15분 정도로 짧게 진행한다. PPT 전사 포맷이 있기 때문에 디자인은 신경 쓰지 않고 다들 내용만 간결하게 하게 적어 넣는다. 이 발표의 내용은 예를 들면, Product 팀에서 최근에 어떤 기능을 업데이트했는지 혹은 Marketing 팀에서 최근에 어떤 이벤트를 진행했고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등의 내용이다. 매주 이 내용만 잘 들어둬도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다. 최근에는 1분기 마감 기념으로 세일즈 팀에서 매출에 대한 발표를 했다. 이번 분기의 목표치와 실제 달성률을 설명했다.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잘 되었고, 어떤 부분이 어떻게 잘 안되었는지 가감 없이 설명해줬다. 잘하고 못하고 평가받는 자리가 아니라,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자리이기에, 으스댈 필요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지난 분기와의 비교, 그리고 다음 분기에 대한 목표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줬다. 매우 놀랐다. 지금까지 어떤 회사에서도 매출에 대해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에서는 투명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게 매출에 관한 구체적인 수치에까지 적용될지는 몰랐다. 이렇게 팀 발표가 끝나고 나면, 마지막으로 AMA 순서이다. "Ask Me Anything"의 약자로, CEO에게 뭐든 묻고, CEO는 뭐든 대답하는 시간이다. 보통은 미리 익명으로 질문을 받아 놓고, CEO 가 그 자리에서 질문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답변한다. 익명으로 질문을 수집하기 위해 별도의 웹서비스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미팅이 있기 며칠 전에 미리 질문을 올릴 수 있도록 URL 이 전사에 공유된다. 질문은 시답잖은 이야기에서부터 민감한 사항에 까지 다양하다. 예를 들면 이렇다. 어떤 사람이 "프랑스 직원들끼리만 모여 있을 때 아무래도 영어 대신 자연스럽게 프랑스어로 대화하게 되는 상황"에 대해 괜찮은지 질문했고, CEO는 단호하게 "No"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에는 프랑스인밖에 없겠지만 그게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을 제외시킬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늘 영어만을 사용하며 모두를 포함하는 방향의 문화를 유지하자고 강조했다. 이렇게 사내 문화에 관한 질문뿐 아니라 도쿄 오피스 셋업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투자에 관한 질문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질문이 오가고 CEO는 한 가지도 빠지지 않고 답변을 해준다. 만약 답변을 해줄 수 없는 질문이라면, 왜 답변을 해 줄 수 없는지 납득을 시켜준다. 이게 매주 시행되기 때문에 항상 개운하다. 그리고 이 미팅 전체는 녹화되어 공유된다. 회사 내에 정보를 일부가 독점하고 그걸 권력으로 이용하려 든다면 이런 미팅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 다른 팀의 저조한 실적을 험담 하는 게 일상인 분위기라면, 역시 해서는 안 되는 미팅이다. 하지만 회사 내에 투명성을 부여하고 그걸 회사의 성장 동력으로 이용하려 한다면, 위에 적은 이야기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서로 공유하고, 그 내용을 믿고, 동일한 목표를 바라보며 서로 돕는 문화가 있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
파리에 도착한 지 2주쯤 지났을 때였다. 집을 구하느라 아내와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 원하던 집에서 우리 서류를 거절한 이후로 우리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아침 일찍 간단하게 챙겨 먹고 부동산을 만나 아파트를 한 군데 봤다. 집이 별로였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로 발길을 돌렸다. 스타벅스만 한 곳이 없다. 인터넷과 커피, 노트북을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 게다가 허기가 지면 간식이나 밥 비슷하게도 때울 수 있는, 최적의 작업 환경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곳은 관광객이 다소 많은 지역이었다. Bar 자리에 앉아 열심히 집을 알아봤다. 아내는 맥북으로 매물을 검색하고, 나는 아이패드로 아내가 찾아 공유해준 매물의 부동산들에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영어를 잘 못하는 프랑스인들과 영어로 통화하는 일은 참 어렵다. 서로에게 있어 문자나 메일이 훨씬 편한 소통 수단이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문자나 메일로 대화를 돌리려 해도 메일 주소를 알려주는 것부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 i는 "아이"라고 읽지만, 불어에서는 "이"라고 읽는다. 그래서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에게 메일 주소를 알려주면, 이런 식으로 잘못 전달될 확률이 높다. 한동안 진땀을 뺐더니 허기가 졌다. 무언가 먹어야 했다. 아내에게 쿠키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한 사람은 자리와 짐을 지켜야 하니깐. 아내가 계산을 하러 저기 갔는데, 문득 내 카드로 결제를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내 카드가 있는 내 가방 들어 올리려는데, 내 가방이.. 없다. 아내가 내 가방을 통째로 들고 계산하러 갔나? 다급하게 고개를 뻗어 보지만 사람들에 가려 아내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리를 떠서 아내에게 가서 내 가방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기엔 자리의 맥북과 아이패드를 지켜야 한다. 심장이 벌렁거린다. 10분 같은 1분이 지난 뒤, 아내가 쿠키를 들고 자리로 왔다. 아내에게 내 가방이 없다. 침착하려 노력하며 아내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자리를 지키게 하고 카운터로 가서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다행히 그중 영어 잘하는 직원이 있었다. 직원이 혼자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cctv를 확인하고 나왔다. 범인이 가방을 가져가는 장면이 녹화되었다고 한다. 경찰에 신고하고 경찰이 오면 자기가 cctv 영상을 제공해 준단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범인이 내 가방을 슬쩍한 후에 바로 도망간 것도 아니고 내 발 옆의 가방을 가져다가 열어서 내용물을 쭉 훑어본 후 유유히 사라졌단다.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뭘 잃어버렸나 적어보았다. 200유로. 크게 중요하진 않은 서류 몇 장. 아, 그리고 여권. 우리 둘 모두의 여권이 내 가방에 있었다. 그 여권엔 심지어 비자도 붙어 있었다... 상당히 골치 아파졌다. 스타벅스 직원이 알려준 대로 근처의 경찰서에 갔다. 경찰이 하는 말이 지금은 오늘의 업무가 밀려 있어 내일 아침에 일찍 오면 바로 처리를 해준단다. 오후 4시쯤이었다. 이 동네는 경찰서가 바쁜 동네였다... 주변 몇 블록을 돌아다녔다. 훔친 사람이 돈만 빼고 가방은 버렸을까봐. 그러면 그 안에 여권은 되찾을 수 있을까봐. 안타깝게도 보이지 않았다. 가방을 좀 더 잘 챙기지 못한 자책감과 바쁜 일정에 불필요한 일을 더해버린 스트레스가 겹쳤다. 아내가 날 계속 위로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경찰서에 가서 서류를 작성했다. 우리가 여권을 포함해서 어떤 것들을 잃어버렸는지 적었고 경찰서 도장을 그 서류에 받았다. 그리고 한국 대사관에 갔다. 여권 재발급을 신청했다. 2주나 걸린대서 추가 비용을 내고 최대한 빨리 오는 걸로 요청했다. 1주쯤 걸린단다. 일단 여권을 최대한 빨리 되찾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날 계좌 개설을 위해 잡았던 은행과의 약속도 일단 미뤘다. 여권이 없으니 계좌 개설도 불가하다. 여권도 없고 은행계좌도 없는 의심스러운 우리를 어느 부동산에서 받아줄지 겁이 났다. 결국 1주일이 지나고 여권을 받고, 바로 그 날 은행에 가서 계좌를 개설하고, 다음날 부동산에 가서 집 계약을 구두로 합의하고 이틀 뒤에 정식으로 사인하고 집 열쇠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 이삿짐이 도착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을 극적으로 잘 맞춰냈다. 그리고 지인의 충고에 따라 경찰서에서 받았던 서류는 계속 보관하기로 했다. 나중에 누군가 내 여권으로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리면, 내가 한 게 아니라 분실된 여권으로 그 사람이 저지른 짓이라는 걸 증명하는 게 바로 그 서류이기 때문이다. 유럽에 가면 소매치기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들었지만, 그게 내가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고 둘이어서 비교적 침착할 수 있었고, 해야 하는 일들을 차근히 해나가서 문제 상황을 잘 벗어났다. 이런 사건들을 겪으니, 이제는 감당 못할 시련은 없겠다는 내성이 생겼다.
약 두 달 전, 이 회사에 입사했다. 입사 첫날 어떤 스케줄로 하루를 보내게 될지 몰랐다. 그리고 그날 있을 신규 입사자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감동을 받을 줄도 몰랐다. 회사에 도착하니 어떤 직원이 인사를 건네 왔다. 그리고는 나의 온보딩 버디(onboarding buddy)가 xx 라며 그 친구를 불러줄 테니 기다리라 했다. 이 회사에는 온보딩 버디라는 제도가 있는데, 이 회사에 입사해서 정착하기까지 도움을 주는 친구 같은 개념이다. 사수-부사수와는 다르다. 회사와 프랑스 생활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돕는 친구로서의 역할이다. 곧 내 온보딩 버디가 왔다. 같이 커피를 마시며 오늘 나의 스케줄을 전해 들었다. 은행, 휴대폰 개통, 집 인터넷 설치 등 불어가 필요할 때 언제든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메일은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얻을 수 있지만 전화 통화는 절대적으로 프랑스인의 도움이 필요했던지라 너무 고마웠다. 10여분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본격적인 신규 입사자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 6명이었다. 첫 교육은 Security Training이었다. 일반적인 뻔한 보안 교육이 아니었다. 굉장히 실용적이고 구체적이었다. 문제 상황에서는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하는지 사소하지만 중요한 내용들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 회사에서는 Password Manager 프로그램, 예를 들면 1 Password, LastPass 등의 프로그램 사용이 필수였다. 그리고 모든 업무적으로 사용되는 비밀번호는 랜덤 하게 생성된 비밀번호를 사용하고 Password Manager 가 이를 관리하도록 한다. 보안 담당자는 비개발자도 이해할 수 있게 자세히 설명해줬으며, 이를 따르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사례를 들어 재미있게 알려주었다. 두 번째 시간은 시설 담당자가 와서 시설에 대한 설명을 해줬다. 우선 출입카드를 나눠줬다. 그리고 메인 출입구와 보조 출입구 위치, 그리고 비상구 위치를 설명해줬다. 비상구 위치라니. 비상구 위치를 입사 교육에서 듣게 될지 몰랐다. 누군가는 형식적인 것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형식이라도 있는 게 대단하달까? 그리고 이 담당자와 다 같이 건물의 이곳저곳을 다녔다. 구내식당이 어디에 있는지 가보고, 주차장이 어디에 있는지, 자전거 주차장은 어디에 있는지, 직접 다 같이 다녔다. 나 같은 길치는 말로만 들으면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에 같이 다녀준 게 참 고마웠다. 물론 바로 몇십 분 뒤, 구내식당 위치를 헤매서 애를 먹긴 했다. 점심을 먹었다. 구내식당이라 생각할 수 없는 훌륭한 음식이었다. 세 번째는 장비 지급 시간이었다. 신규 입사자는 6명인데, IT 팀 직원이 3명이나 왔다. 다 같이 노트북을 펼치고 초기 세팅을 진행했다. Password Manager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그걸 이용해서 주요 사이트에 가입하고 사용하는 방법까지 6명 모두가 익숙해지도록 알려주었다. 보안 교육 때 Password Manager 프로그램을 써야 안전하다고 한 말뿐인 교육이 아니라, 실제로 완전히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연결된 교육이 있었던 점이 좋았다. 네 번째는 인사팀과의 시간이었다. 인사팀의 멤버들이 각자 어떤 역할을 하는지, 회사에서 어떤 교육들을 제공하는지, 문의 사항이 있으면 어떻게 Jira 티켓을 생성하는지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참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이 제공되고 있었다. 영어 수업, 불어 수업도 제공되고, Public Speaking 수업도 있어서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업들은 업무 시간에 진행되며, 무료이고, 매니저와 상의하에 신청할 수 있다. 눈치 볼 필요 없이 수업을 신청하면 되고, 매니저도 좋은 수업을 들으라고 먼저 교육 프로그램을 추천해주는 분위기이다. 다섯 번째는 내 매니저와의 미팅이었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좋았다. 구글 캘린더에 30분짜리로 잡혀 있었다. 그때가 대강 4-5시쯤이었다. 은재, 정신없지? 앞으로 잘해보고, 어려운 거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정도로 가볍게 대화 나누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 매니저가 "Eunjae Lee - Launch Plan"이라는 문서를 들고 와서는 내가 이 회사에 어떻게 적응하게 될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 30일간의 목표, 그다음 30일, 그다음 30일. 총 3개월에 걸쳐 내가 단계적으로 밟아가면 될 목표들을 설명해줬다. 시험하고 탈락시키기 위한 목표가 아니었다. 조직에 녹아들 수 있게끔 점진적으로 잘 짜인 목표였고, 그 목표를 위해 나를 밀착해서 도와줄 팀 동료도 할당되었다. 신규 입사자가 왔으니 밀린 일을 시키려는 그런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정말 이대로 차근차근 시간을 들이면, 동료들과 협업이 익숙해지고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정말로 이 회사는 내가 잘 온보딩 하기를 바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여섯 번째로 온보딩 버디와 다시 만났다. 커피 한잔 마시며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내가 통신사에서 유심을 하나 샀는데 배달이 통 안 온다고 어쩌면 좋겠냐 물었다. 그 동료가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며 이틀 기다렸다가, 그래도 안 오면 자기가 통신사에 전화를 해서 문의를 해준다고 했다. 마음이 편해졌다. 폭풍 같은 하루가 지났다. 그 이후로도 하루에 한 두 개씩 교육 프로그램이 2주간 있었다. 각 팀별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설명해줬다. 이 회사는 내가 회사에 잘 녹아들 수 있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글로는 다 표현하지 못했을지라도 내가 느꼈던 그 케어는 참 섬세하고 감동적이었다. 잘 적응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매일 얼음을 산다.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 얼음 한 봉지를 사서 달랑달랑 들고 집으로 간다. 집 근처에는 얼음 파는 마트가 없다. 그래서 기차역을 한 정거장 일찍 내려서 그쪽에서 얼음을 산다. 그리고 버스를 두 정거장 타고, 내린 후 10분쯤 걸어 집에 간다. 하루도 빠짐없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2015년 10월 말에 우린 결혼했다. 결혼을 앞두고, 미리 구해 놓은 집에 가전제품을 사서 들여놓고 있었다. 냉장고를 보러 갔다. 미니멀하게 살고 싶었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800 리터 대의 용량밖에 없었다. 아주 드물게 650 리터 짜리 모델이 있긴 했는데, 결국엔 815 리터 짜리를 사게 되었다. 한국에 800 리터보다 작은 냉장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미니멀은 역시나 환상이었던 건지 815 리터 짜리 우리 냉장고는 생각보다 금세 찼다. 양가 부모님이 주시는 집된장, 고추장, 간장, 고춧가루 등의 식재료 부피가 상당했다. 다시마, 멸치 등 육수를 우리기 위한 건어물도 냉동실의 한편을 차지했다. 게다가 배추김치, 파김치, 갓김치 등 아무리 거절해도 자꾸만 주시는 김치의 부피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생각해보니 한식의 특징인지, 오래 저장해 두고 먹는 것들이 참 많았다. 싱가포르로 이사 갈 때 그 냉장고도 무사히 잘 가지고 갔고 잘 썼다. 이번에 파리로 이사 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삿짐이 우리 집에 도착하던 날, 모든 박스가 집으로 들어왔지만, 하나만큼은 안된다고 인부 아저씨들이 말했다. 바로 냉장고였다. 우리 집 현관문에서 부터 주방 문까지 모든 문의 폭이 냉장고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았다. 주방 창문이 커서, 창문을 뜯고 사다리차로 올리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사 업체에서 집주인의 동의가 필요하니, 일단 냉장고는 창고로 되돌아갔다가 허락을 받으면 다시 오겠다고 했다. 급하게 부동산에 연락했고, 부동산은 집주인으로부터 답변을 받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다음날 연락을 받았다. 집주인이 반대했다고 한다. 창문이 고장 나면 내가 돈 들여서 고치겠다고 했는데도 거절당했다.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이사 업체에 잠시만 맡아 달라고 하고, 중고 거래 사이트에 우리 냉장고를 판매하려고 올렸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문들을 통과할 수 있는 작은 새 냉장고를 알아보고 주문했다. 싱가포르에서 아이스박스에 담아 직접 들고 온 것들이 있었다. 김치, 집된장, 새우젓 등 몇몇 식재료였다. 별것 아니지만 해외라 구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임시 숙소에 있을 때는 냉장고에 보관했는데, 새 집으로 이사 오고 있을 줄 알았던 냉장고가 막상 없으니 그것들을 보관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아이스박스 내부 온도를 낮추기 위해 얼음을 매일 교체해주기 시작했다. 약 2주간 매일 같은 시각 얼음 한 봉지만 사가는 불어 못하는 낯선 동양인 남자를, 그 마트 직원들은 희한하게 봤을지도 모른다. 새로 산 냉장고는 540 리터였다. 하지만 이쪽 가전 매장에서는 여전히 특대로 분류된 제품이었다. 우리나라가 냉장고를 참 크게 쓴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그리고 중고로 판매하려던 우리의 냉장고는 끝끝내 주인을 찾지 못했다. 아무리 가격을 낮춰도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동료의 농담에 의하면 파리에 사는 사람들 주방에 저 냉장고를 넣으면 주방 공간 절반밖에 남지 않을 거라 아무도 안 살거라 했다. 결국 난 이사 업체에 그 냉장고를 가지던지 버려달라 부탁했다. 예상치 못한 이슈가 머리를 아프게 하고 불필요한 큰 지출을 가져왔다. 큰 덩치로 해외 이사를 하다 보니 겪을 수 있는 문제이지만, 막상 겪으면 어렵다. 그래도 새로 산 냉장고가 마음에 들어 다행이다. 무엇보다, 얼음을 더 이상 사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수년 전 옛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내 카페에 커피를 마시러 갔는데 세일즈 직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나치다 우연히 대화 일부를 들었다. 돈 벌어오는 건 우리 팀이잖아. 자신들이 돈을 벌어오는 부서이기 때문에 보너스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취지의 대화였다. 나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세일즈 직원이 돈을 벌어올 수 있는 건, 개발팀에서 서비스를 개발했기 때문에 그 서비스로 세일즈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개발하기 위해 기획, 디자인, QA 등의 부서가 필요했으며, 개발 이후에는 마케팅의 역할이 필요했고, 이 모든 것이 원활히 돌아가기 위해 회계팀과 총무팀의 역할도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수익을 자신들만의 공으로 여겼다. 몹시 불쾌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분기별 수익 목표가 있다. 그 목표를 달성하면 부서 상관없이 전 직원이 보너스를 받게 된다. 전사가 하나의 팀으로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고, 목표를 달성하면 모두가 다 같이 보상을 받는다. 물론 목표를 달성 못했다고 보너스가 아예 없는 건 아니고 달성한 만큼에 비례해서 보너스를 받는다. 입사 전 면접관이 이런 보너스 구조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보너스를 못 받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말도 귀띔해줬다. 지금껏 매 분기마다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이다. 전 직원의 사기와 성취감은 아마 하늘을 찌를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 내용을 알고 있는 채 입사를 했고 몇 주 안돼서 전사 발표가 있었다. 보너스 구조를 바꾸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그리고 바꾸게 된 계기를 전 직원에게 설명해줬다. 간략히 요약하면 보너스의 일부를 기본급으로 넣어주겠다는 얘기였다. 보너스는 직원의 레벨(직급)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밝히자면 나는 15퍼센트의 보너스를 받는다. 바뀐 정책에서는 그 15퍼센트 중에 10퍼센트를 그냥 기본급으로 넣어주고, 분기별 목표 달성 시 5퍼센트의 보너스를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바꾼 이유는 몇 가지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선, 채용 담당자들이 지원자들로부터 '기본급이 중요하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기존 직원들 입장에서도 아파트 월세 계약을 하는 데 있어 프랑스에서는 기본급이 낮으면 불리하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한다. 그리고 보상 체계를 잡는 걸 도와주는 컨설턴트 업체와 협업해오고 있는데, 기본급이 업무 퍼포먼스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는 걸 배웠다고 한다. 다 같이 잘해보자며 보너스를 전 직원에게 줬다. 그러다가, 보너스를 전 직원에게 주는 것보다 전 직원의 기본급을 올려주는 게 더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걸 실행에 옮겼다. 그래서 전 직원이 얼마 전에 수정된 연봉 계약서를 받고 사인했다. 나는 입사 한 달 만에 연봉이 10 퍼센트 오른 셈이다. 기분이 좋았다.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직원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몸소 경험했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 노력했던 이들의 결실을 나도 얼떨결에 맛보았다. 나도 열심히 노력해서 회사 성장에 기여하고, 우리 모두가 다 같이 또 큰 보상을 받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헛된 기대가 아닌, 얼마 전에도 막 겪었던 굉장히 현실적인 기대라 즐겁다.
내가 작성한 코드는 리뷰된 적이 별로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 다들 바쁘다. 코드 작성 및 디버깅할 여유도 없는데 남의 코드 봐줄 시간이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내 경우 팀 내에 JavaScript 개발자는 거의 항상 내가 유일했다. 다른 언어를 주로 사용하는 팀원들이 내 코드를 리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심리적인 요인도 존재할 것이다. 코드 리뷰를 많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특히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코드를 자신과 동일시하기 쉽고 다른 이의 리뷰에 자존심이 구겨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남에게도 피드백을 주지 않고 "다 좋습니다" 라며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난 정말 의견을 듣고 싶었다. 남들은 이 코드를 어떻게 달리 작성할지 궁금했다. 지금 다니는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 화상 통화로 면접을 진행했다. 하지만 최종 면접은 파리로 가야 했다. 회사에서 비행기, 숙소 그리고 약간의 체류비용을 지원해줬다. 면접은 하루 동안 꽤 강도 높은 스케줄로 진행되었다. 중간에 내 매니저가 될 사람과 1:1 인터뷰를 가졌다. 그가 내게 이 회사에서 기대하는 부분에 대해 물었다. 나는 많이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코드 리뷰를 포함해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답했다. 네가 작성한 코드의 버그는 네 책임이야. 하지만 코드 리뷰가 이루어지고 난 후에 발견되는 버그는 너와 리뷰한 모든 사람의 책임이야. 마찬가지로 너도 다른 이의 코드를 리뷰해야 하고, 너도 그 코드에 대한 책임을 갖게 되는 거야.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코드 작성만큼이나 코드 리뷰는 동등하게 중요한 업무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입사해서 업무를 해보니 정말 그렇다는 걸 느끼고 있다. 다만, 이걸 잘못 해석하면 안 된다. 책임 소재를 트래킹 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그런 분위기의 조직이라면 코드 리뷰를 하든 말든, 소용없다. 조금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자. 개발은 develop 브랜치 위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아무도 develop 브랜치에 바로 작업하지 않는다. 항상 새 브랜치를 생성해서 작업한 후 pull-request를 보낸다. Repository에 따라 어떤 repo는 한 명의 reviewer 가 approve 하면 merge 되며, 어떤 repo는 두 명의 reviewer 가 approve 해야만 merge 될 수 있기도 하다. github에서 설정이 가능하다. 다들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드라이하다. 더 낫다 생각되는 이유만 간결히 제시한다. 그리고 PR 작성자는 의견을 수동적으로 전부 반영하진 않는다. 서로 주고받는다. 그러다 보면 한 PR 내에 커밋 개수가 많아진다. 하지만 괜찮다. 팀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일하는 팀에서는 PR 은 무조건 squash & merge 되도록 github에 설정이 되어 있다. 하나의 커밋으로 merge 되기 때문에 히스토리가 복잡해질 염려도 없고, 그 커밋에 대한 세부 내용은 추후 PR 상에서 오간 대화를 참고하면 된다. 단 한 줄을 수정하더라도 PR 생성은 필수이다. 누가 만든 커밋인지, 누가 approve 했는지, 남겨진 대화를 통해 그 결정에 대한 히스토리를 알 수 있다. 이런 절차를 거치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며 높은 품질의 코드를 작성하기 위함이다. 당장은 느려 보이지만 혼자 작성한 코드가 배포된 후에 장애를 일으키고, 장애 상황에서 버그를 찾아내고, 고객에게 끼치는 피해를 최소화한 후에 새로 업데이트하는 비용을 고려하면, 이 느려 보이는 프로세스가 사실은 더 빠르고 효율적이다. 게다가 배포에 자신감이 생기며, 리뷰를 할 때마다 조금씩 배우게 된다. 이런 프로세스를 가지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아마 시스템일 것이다. 팀원들은 하고 싶더라도, 이런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매니저라면 시작조차 할 수 없으며, 시작하더라도 시늉만 하다 흐지부지 된다. 코드 리뷰를 도입하면 당장은 코드를 생산해내는 속도가 줄어든다. 코딩을 하는 시간을 덜고 그 시간에 리뷰를 하기 때문에 당연하다. 하지만 이게 결국엔 더 좋은 결과를 낸다는 믿음이 있는 매니저는 코드 리뷰를 감안해서 스케줄링을 한다. 이렇게 코드 리뷰가 업무 시간의 일부를 정식으로 차지해야 한다. 시간과 노력의 투자 없이 개발 문화는 풍성해질 수 없다. 결국 코드 리뷰는, 팀원들이 바빠서, 언어가 달라서, 동료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에 못했던 게 아니다. 단지 그 프로세스가 우리 업무 속에 없었을 뿐이다. QA 팀에서 버그를 발견했다고 개발자에게 미안해하거나, 버그가 발견되었다고 개발자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업무 프로세스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코드 리뷰도 코딩만큼이나 중요한 하나의 업무로써 프로세스 안으로 들어오면 된다. 그러면 버그를 줄일 수 있으며, 자신감이 생기고, 매일매일 배우게 되며, 결과적으로는 팀 전체가 성장한다.
파리에 도착해서 집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힘들다는 이야기는 이미 익히 들었다. 게다가 우리가 싱가포르에서 보낸 이삿짐(가구 및 살림)이 배에 실려 오고 있었다. 그 모든 게 들어가는 조금 큰 집을 구해야 했다. 파리에서는 세입자 간 경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막상 계약을 맺고 나면, 세입자가 월세를 안 내더라도 집주인이 강제로 쫓아내는 일이 법적으로 굉장히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집주인은 세입자를 고심해서 고른다. 한국에서는 먼저 온 사람이 먼저 계약하면 끝이지만, 여기서는 집주인이 세입자들의 서류를 다 받아놓고 그중에 맘에 드는 세입자를 뽑아 계약이 진행된다. 나는 다음 서류들을 준비해 갔다. 여권 사본 지난 3달간의 급여 명세서 지난 3달간의 월세 영수증 최근 세금 고지서 프랑스 내에서의 고용 계약서 이 서류들을 준비하느라 퇴직 전에 싱가포르에서 미리 급여 명세서를 준비하고, 집주인에게 요청해서 월세 영수증도 챙겨두고, 세금 고지서도 준비해놨다. 사실은 프랑스에서의 급여 명세서, 월세 영수증, 세금 고지서여야 하지만 그건 없으니 싱가포르에서의 서류들이라도 준비해뒀다. 우리의 프로세스는 이러했다. 아내가 괜찮은 주거 지역을 조사했다. 그리고 그 지역에 매물이 있는지 부동산 사이트를 검색하고 괜찮은 매물들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나보다 눈썰미가 좋아서 나는 절대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을 단 몇 장의 사진만으로 알아냈다. 그러면 나는 그 매물들을 가진 부동산에 연락을 돌렸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연락 돌리는 중, 나한테 연락 주기로 함, 약속 잡음, 보고 맘에 들어서 서류 보냄, 거절당함 등의 상태를 기록해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아내가 검색해 낸 매물이 백 군데는 족히 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만큼 연락을 돌려 봤자 실제 약속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열 손가락 안에 꼽혔다. 전화를 돌리다 보면 의사소통이 가장 어려웠다. 통화로는 서로 힘드니, 전화번호나 메일 주소을 알려줘서 그쪽으로 소통 수단을 갈아타면, 그다음부터는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았다. 집 볼 약속을 바로 잡아주는 부동산은 거의 없었다. 보통은 약속을 잡기 전에 위 서류들부터 요구했다. 그래서 서류를 보내면 보통은, 다른 사람들의 더 좋은 서류에 밀린 건지 연락이 안 왔다. 며칠 기다렸다 조심스레 다시 전화해보면 다른 사람이 됐다는 식이다. 그러다 최고의 집을 만났다. 약속을 잡고 집을 둘러봤는데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이런 집은 다시는 못 만날 집이었다. 부동산 직원에게 마음에 든다고 계약하고 싶다고 했고, 직원이 서류를 메일로 보내라고 했다. 기쁜 마음으로 그날 저녁 서류를 잘 정리해서 보냈다. 우리는 신났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그 집에서의 생활을 그려보았다. 찍어둔 사진들을 보면서 가구 배치도 논의했다. 그렇게 며칠 지났는데, 부동산에서 통 연락이 없었다. 귀찮아할까 봐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결국에 조심스럽게 연락을 해보았다. 다른 사람의 서류가 선택되었다고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여기선 집주인이 서류를 선택하는 방식이란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습관적으로 그 집이 우리 집이 되었다고 뇌가 착각해버렸었다. 먹먹한 기분을 어찌할 수 없었다. 다시 열심히 집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미 2월 둘째 주였다. 싱가포르에서 오는 짐은 2월 말에 도착 예정이었고, 나는 3월부터 출근할 예정이었다. 만약에 제 때 짐을 구하지 못하면 정말 큰일이 난다. 임시 숙소를 연장해야 하고, 이사 업체에 비용 지불하고 이삿짐 보관 서비스를 받아야 하며, 나는 어차피 3월부터 출근은 해야 하니 아내가 혼자 집을 알아보러 다니다 계약할 즈음엔 내가 휴가를 내고 계약서 쓰러 합류하는 등 보통 머리 아파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에겐 더욱 부담되는 일이었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내 서류는 자꾸 탈락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내 월급이 월세의 3배가 안되어서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동산에서 나에게 물어봐서 내 월급이 얼마라고 말해주면, 그들은 그게 세전인지 세후 인지까지도 꼼꼼히 따졌다. 내 고용 계약서에 수습기간이 포함되어 있어서 거절당하기도 했다. 집을 구하던 건 2월인데 출근은 3월이라, 아직은 일을 시작 안 했다며 거절당하기도 했다. 거절 사유를 알려주기라도 하면 감지덕지였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우여곡절을 거치고 2월 셋째 주 목요일에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열쇠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목금토일 청소를 했고, 월요일에 이삿짐이 들어왔다. 이삿짐을 한 주간 풀고 정리하다가 그다음 월요일 나는 출근을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타이밍들이 잘 맞아떨어져서 정말 다행이었다. 집은 딱 우리 부부의 성격에 맞는 곳으로 구했다.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 관광객은 전혀 없고 프랑스인들만 사는 동네, 동네 식당에 가면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식사를 하고 계시는 그런 곳이다. 파리 시내를 약간 벗어난 외곽이지만 도보 15분 + 기차 15분이면 집에서 회사까지 가는 교통도 좋다. 회사 사람들은 어떻게 한 달 만에 집을 구했냐며 놀라 했고, 나는 그저 웃으며 열심히 노력했다고 말했다. 숨 막히는 2월을 보냈다. 아내와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제 아무리 큰일이 생겨도 이번에 집 구한 것보다 크고 어렵진 않을 거라고. 마음이 정말 편해졌다.
작년 여름, 지금 다니는 이 회사에 지원하기로 결심하고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영어로 이력서를 써보는 건 처음이라, 어떤 양식에 쓸지 몰랐다. 검색해보니 많이 쓰이는 것 같은 양식을 하나 찾았다. 꽤 많은 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작성해서 제출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고 보니,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내 이력서에 내 사진, 성별, 그리고 나이가 없다! '사진이야 한국에서도 많이들 안 넣는 추세니깐.' '저들은 성별도 전혀 상관없이 뽑나 보네?' '아무리 그래도 생년월일은 적어야 하지 않나.' 많이 쓰이는 양식을 따랐을 뿐인데 저런 항목들이 빠져 있어서 놀라웠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아무도 내 나이를 묻지 않았다. 지금도 팀 동료들은 내 나이를 모를 것이다. 한국에서는 나이가 중요하다. 처음 만나면 나이를 묻고, 나이에 따라 누가 누구에게 반말을 할지 결정된다. 별것 아닌 일에도 나이가 많은 사람 의견에 은근히 힘이 실린다. 사람을 평가할 때 "나이가 몇 살인데" 혹은 "아직 어린 게"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나이가 평가의 기준 중 하나인 것이다. 관계와 대화 속에서 '나이'라는 개념은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한편, 한국에서는 정답을 강요한다. 어떤 직업군이 유망하다고 결론 나면 다 같이 그 방향으로 달린다. 다른 방향으로 가면 혼난다. 외모가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타박한다.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로 편의점에 가면 실례라고 한다. 몇 살까지 결혼을 안 하면 노총각, 노처녀로 분류된다. 요즘은 그 기준이 늦춰졌지만 여전히 기준은 존재한다. 창의성을 강조하지만 다양성은 존중받지 못한다. 동의와 비동의가 공존하는 걸 견디지 못한다. 어떤 주제가 이슈화되면 모두의 의견이 하나로 일치되어야만 한다. 내가 느끼는 한국 사회는 모난 돌이 정을 참 많이 맞는다. 나이가 중요하고, 정답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나이와 정답,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까? 남자는 군대를 포함해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1-2년 안에 취업하면 성공이라 말한다. 여자는 군대를 안 가니 그보다 2년 먼저 취업해야 성공이라 한다. 물론, 요즘은 남자나 여자나 취업 성공 시점에 대한 기준이 비슷해져 가는 것 같다. 어쨌든 그 기한을 넘기면 실패다. 취업을 하고 나면 그 회사와 연봉이 심판대에 오른다. 취업을 잘했는지 못 했는지 주변에서 평가받는다. 연봉이 주변과 비교되며 성공적인지 판단된다. 몇 년 일하다 보면 연차가 얼마니 이쯤엔 대리를 달아야 하며, 대리니까 연봉은 어느 정도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해내면 성공, 아니면 실패. 아이도 제 때 낳아야 하고, 늦어지면 만나는 모든 이로부터 잔소리에서부터 심하면 어디 안 좋냐는 걱정까지 듣는다. 부정적인 면을 극대화해서 적어보았다. 나는 그런 지점들이 불편했다. 사회가 스스로 만든 너무나 많은 제약이 갑갑했다. 설령 그게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일지라도 그 길을 벗어날 권리를 되찾고 싶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디자이너로 일을 하던 어떤 사람이 서른 중반에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고 직업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 노력은 가상하나, 기초 밖에 모르는 서른다섯 살의 신입 사원을 거둘 회사가 한국에 많지 않을 것이다. 같은 신입이면 한 살이라도 어린 사람을 뽑을 것이다. 설령 입사하더라도, 서른 살의 경력 사원이 서른다섯 살의 신입 사원을 가르치는 건 여러 모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는 나이가 정말 아무 의미 없다. 그 사람은 그저 신입 개발자이며, 신입이라 실력이 당연히 부족한 것일 뿐이다. 그 사람의 사수 또한 신입 개발자를 대하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어서 관계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애초에 한국과 달리 나이와 직급이 비례해야 한다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다. 지난 글에 언급했지만, generalist 였던 내가 specialist 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 분야에 대해 더 깊이 배우고 성장하려면 여기 만한 곳이 없다 판단해서 이 회사에 왔다. 그래서 내 연차에 비해서 그 분야에 대한 전문성은 부족한 편이다.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 보니, 내가 같이 일할 동료들이 대부분 나보다 열 살 가까이 어렸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는 것도 알고 있어서, 같이 일하면 많이 배우겠다 싶었다. 한국이었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나를 보며 '저 사람은 우리보다 열 살이나 많은데 왜 저렇게 못해?'라는 시각이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고, 그게 날 위축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곳에선 달랐다. 애초에 내가 그 분야에 특출나진 않기 때문에 그들과 비슷한 레벨로 평가되어 입사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 레벨(타이틀)로 나를 바라보지, 나이로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나이를 정확히 모르며, 신경 쓰지도 않고 지내고 있다. 나중에 잡담을 나누다 문득 궁금해지면 서로 물어볼 순 있겠지만 말이다. 참 똑똑한 동료들이다. 입사 전부터 그들이 만들어 놓은 프로덕트에 반했었고, 같이 일을 해보니 역시나 똑똑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작성한 코드를 보며 많이 배우고 있고, 그들이 내가 작성하는 코드에 대해 열성적으로 피드백을 주는 덕에 더 많이 배우고 있다. 딱 기대하던 그림이다. 활발히 의견을 교환하며, 나이에 상관없이 나보다 잘하는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배우는 환경. 즐겁게 지내고 있다.
내 동료들이 내 연봉을 안다. 나도 그들의 연봉을 안다. 약 350명이 근무하는 이 회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사 직원 연봉을 내부적으로 공개했었다.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작년 180명이었던 직원수가 1년 사이에 350명으로 늘었다. 그 가운데 연봉이 공개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직원이 많아졌고, GDPR의 영향도 있고 해서 결국 회사는 이 문서를 비공개로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서로가 서로의 연봉을 대충 안다. 아무래도 이건 한국에서 쭉 일을 해온 나에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대다수에게도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충격을 잠시 뒤로 하고 천천히 짚어보자. 협상이라는 건 양 쪽의 힘이 대등할 때 성립된다.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협상은 없고 일방적인 통보만이 있을 뿐이다. 연봉 협상의 자리가 협상이라기보다 회사 측의 통보가 많은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런데 회사가 가진 또 하나의 무기가 있다면, 그건 바로 정보다. 누가 얼마를 받는지에 대한 정보는 회사만 갖는다. 그리고 회사뿐 아니라 직원들도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 이 정보의 불균형은, 안타깝게도 보통 회사에만 유리하게 작용한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 다들 동결이야. 하지만, 비밀인데 넌 수고했으니 특별히..... 이 마법 같은 말 한마디로 모든 직원의 연봉 상승률은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다 같이 하향 평준화된다. 물론 연봉이 투명하게 공개된다고 무조건 직원에게 좋게 작용할 거란 얘긴 아니다. 특히 시기와 질투가 만연한 분위기라면 부작용이 더 클 것이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연봉 인상을 축하해주고, '저 사람이 왜 저만큼 밖에 안 올랐냐'는 등, 다 같이 좋아지는 방향으로 단합하며 회사를 대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다소 과격한 시도라 생각할 수 있지만, 난 개인적으로 해보지 않고 실패를 생각하는 것보단, 실패하더라도 해보고 어떤 지점에서 실패하는지 배우는 걸 선호한다. 리스크가 큰 만큼 배우는 것도 큰 법이다. 내가 지금 다니는 회사의 연봉 정책은 철저하게 능력 위주다. 연차가 쌓인다고 연봉이 높아지지 않는다. 타이틀별로 연봉의 범위가 테이블로 정해져 있는데, 연봉을 더 받으려면 인정받고 승진해서 타이틀을 바꾸면 된다. 그러면 연봉 테이블에 적힌 그 타이틀에 해당하는 연봉을 받는 것이다. 다른 말로, 같은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연봉을 받는다고 보면 된다. 입사 전에 인사팀에서 연봉을 통보해왔다. 내 예상보다 적었다. 더 받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있었다. 나는 원래 여러 분야를 두루두루 잘 해내는 generalist 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 분야에 집중하는 specialist의 포지션에 지원했다. 그 분야를 깊이 파고 전문성을 얻고 싶었다. 다시 말해 그 분야만 놓고 보면 내가 그렇게 까지 전문가는 아닌 것이다. 소위 내 '연차'에 비해서는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한국인 마인드로는 '내 연차가 있는데 연봉을 그것밖에 안 준다니' 서운했다. 내 매니저가 될 사람과 화상 통화를 했다. 예상 연봉이 낮아서 고민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나에게 설명했다. 은재, 너는 네가 같이 일할 동료들과 같은 타이틀이고 연봉도 같은 수준이야. 내가 너에게 더 많은 연봉을 주려면 더 높은 타이틀을 줘야 해. 그런데 네 동료들이 네가 그 타이틀과 연봉을 받는 것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통화를 끝내고 고민해봤다. 맞는 말이었다. 돈을 많이 받으면 많이 받는 만큼 해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분야에서 그 동료들 이상으로 해낼 능력이 없다. 그들이 지금 판단한 내 수준에 맞는 연봉을 받고, 딱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일을 하자. 잘 못한다는 소리 들을까 봐 전전긍긍하지 말고, 그냥 되는 만큼만 하자. 그게 그들이 평가한 내 수준이고, 딱 그만큼이 내가 받는 연봉에 대한 내 책임이니까. 내가 그쪽 업무와 문화에 적응하고 실력이 늘어서 더 좋은 퍼포먼스를 보이면 6개월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평가를 통해 증명하고 승진을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동료들보다 낫다는 걸 증명하지 못하면 동료들보다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편해지고 조바심이 없어졌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하면 될지 방향이 잡혔다. 이런 투명한 정책이 나에게 오히려 자신감을 줬다.
콕 집어 파리에 오려던 건 아니었다. 이십 대 초반에 다녀온 어학연수를 기점으로 해외 생활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다. 한국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그곳에선 그렇지 않았다. 그 자유로운 낯선 문화가 매력적이었다. 나중에 반드시 해외에서 일하며 살아보리라 결심했고, 이는 영어 공부에 대한 끈을 놓지 않는 계기가 되었다.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에도 늘 말했다. 우린 언젠가 해외에서 살게 될 거라고. 2016년 겨울, 나는 운이 좋게도 다니던 회사의 싱가포르 지사로 발령 났고, 그렇게 우리의 해외 생활은 시작됐다. 싱가포르는 첫 해외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아주 적절한 곳이었다. 영어권이어서 소통에 무리가 없었고, 같은 동양이어서 문화적인 차이를 크게 못 느낀 데다, 인종차별 같은 문제도 없었다. 오히려 한류 덕에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그렇게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난 우연히 발견한 채용 공고에 지원하게 되었다. 그 회사의 이름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참 좋은 서비스를 만드는 회사였다. 그 서비스를 사용할 때마다 그 퀄리티에 감탄했다. 영어 공부 더 하고 포트폴리오를 더 준비해서 1년 후에 지원해 보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가진 지 딱 1주일 후에 채용 공고를 발견했다. 정확히 내 포지션이었다. 게다가 그 회사의 한 직원이 트위터로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오며, 지원을 권유했다. 이게 다 무슨 우연일까. 트위터는 안 쓴 지 오래다. 초반에 열심히 하다가 말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해외의 개발자들은 트위터 안에서 거대한 커뮤니티를 만들어왔다. 좋은 블로그 링크를 주고받고, 토론도 나누고, 관계를 쌓아가고 있었다. 전혀 몰랐다. 나도 좀 껴보고 싶어서 트위터를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트위터에서 채용 공고도 발견했고, 그 회사의 한 직원과도 우연히 서로 팔로우를 하다가 대화도 나누며 지원을 결심하게 되었다. 트위터가 아니었으면 그 기회를 있는지도 모른 채 흘려보냈을 것이다. 이 회사로 옮겨가는 것은 나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수많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Open Source Software)들은 유럽 혹은 미국, 즉 서구권에서 많이 생산되고, 한국은 주로 소비를 하는 입장이다. 소비가 아닌 생산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면 아무래도 보고 배우는 것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곳이야 말로 모든 새로운 것들을 실시간으로 목격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개발 트렌드가 늘 조금씩 늦는다. 한편, 파리로의 이사는 아내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우리는 음식을 좋아한다. 아내가 특히 요리에 관심이 많다. 자연스레 좋은 재료 구해서 요리해 먹는 일이 우리에겐 큰 즐거움이다. 싱가포르에서는 좋은 식재료 구하기가 어려웠다. 싱가포르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고 모든 걸 수입하는 터라, 재료가 신선하지 않거나 혹은 너무 비쌌다. 파리는 다르다. 음식에 있어서는 최고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좋은 식재료도 많고, 식당에 가면 좋은 음식을 즐길 수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요리를 공부해 볼 수도 있다. 내 아내에게 최고의 환경이다. 이렇게 옮겨야 할 이성적인 이유들이 많이 있지만, 내 마음을 결정적으로 뒤흔든 감정적인 이유는 이 회사가 가진 문화였다. 이 회사는 두 사람에 의해 공동 창업되었는데, 처음 둘이서 어떤 문화를 가진 회사를 만들면 좋을지, 회사의 문화에 대한 긴 토론을 나눴다고 한다. 프로덕트는 그다음이었다. 회사 블로그에 올라온 회사 문화에 대한 글을 읽어보고 그 안에서 일해보고 싶어 졌다. 그들이 스스로를 지칭한 Culture-first company라는 표현이 좋았다. 보통은 문화 vs 성장을 놓고 고민하지만 튼튼한 문화 자체가 성장의 전략이라고 한 점도 마음에 들었다. 사실 두 공동창업자가 문화에 대해 먼저 논의했다는 얘기는 '성공을 거두고 난 후 미화하기 위해 덧붙인 설화'처럼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회사에 다니며 문화를 겪어 보니, 사실이라 믿게 되었다. 물론 걱정도 있었다. 내 영어가 그들과 업무 할 수준까지는 안될 거라는 게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결국엔 나와 면접을 거치고 회사가 날 채용하기로 결정했는데, 그건 내 영어가 업무를 못할 수준은 아니란 뜻이다. 스스로를 믿기로 했다. 부딪히다 보면 늘겠지. 게다가 회사에서 나와 아내에게 불어 혹은 영어 수업도 제공해준다고 했으니 가서 배우며 일해보리라 다짐했다. 내 업무 퍼포먼스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잘 해낼 거라 스스로를 믿기로 했다. 오길 잘했다. 입사한 지 아직 한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어느 회사에서도 이런 감동은 느끼지 못했다. 단순히 입사 초반이라 반짝하는 감동은 아니다. 다음엔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눠볼까 한다.
2019년 2월 2일 오전 6시경, 샤를 드 골 공항에 도착했다. 국제 이사의 피로를 안고 비행기에 올라타 14시간의 피로를 더 얹었으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내와 둘이 끌어야 하는 짐은 이민 가방 2, 큰 캐리어 2, 작은 캐리어 1, 아이스 박스 1, 백팩 2, 다 합쳐 대략 100kg. 추가 비용 어마어마하게 내고 온 짐이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택시를 기다리다 보니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한기가 느껴졌다. 내가 살던 적도 근처 싱가포르엔 없는 공기였다. 파리로 오기 직전 한국에 잠시 들렀으니 겨울을 얼마 전에 느끼긴 했다. 하지만 한국의 겨울은 '내가 살지 않는 나라의 것' 일 뿐. 택시를 기다리며 느낀 한기는 사계절의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나라에 다시금 놓이게 된 걸 깨닫게 했다. 그 점이 기뻤다. 나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 파리의 한 스타트업에 채용되어 파리로 이주했다. 꼭 일해보고 싶었던 회사였다. 배울 점이 너무 많아 보였다. 기대가 컸다. 한편, 디자이너였던 아내는 취미로 즐기던 요리에 점점 진지하게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특히 싱가포르에 지낸 2년간 많은 연습과 연구를 해가며 스스로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둘에게 파리 행은 무척이나 설레는 일이었다. 앞으로 많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이 회사에 서류를 제출하기로 결심한 시점부터 최종 합격 하기까지의 과정, 싱가포르에서 파리로 모든 가구들을 포함해 국제 이사를 진행하고, 파리에 와서 임시 숙소에서 지내면서 집을 구한 과정, 파리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소소한 것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연재를 결심하게 만든 이 회사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문화에 대해 나누고 싶다. 좋은 문화에서 일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리고 싶고, 조금이라도 이런 문화가 다른 곳에도 퍼질 수 있기를 바란다.